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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숨과 뜨거운 구슬 _ 허선정 개인전 _ 2025. 9. 21 - 9. 28
  • 작성자 artspace103
  • 조회수 3
2025-10-04 12:15:04

 

 차가운 숨과 뜨거운 구슬 

 허선정 개인전 

 2025. 9. 21 - 9. 28 

 

차가운 숨과 뜨거운 구슬

가끔 답답하거나 마음을 정화하고 싶을 때, 나는 가까운 보문사를 찾는다. 산 위에서 바라본 바다는 광활하고 고요하다. 근경의 물 위에 드문드문 보이는 갯벌은 먼 섬과 이어지는 듯, 이어지지 않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을 들여다보려 하지만, 그 속에서조차 나는 인간의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있는 듯하다.

고요한 풍경은 잠깐의 휴식일 뿐, 내가 보는 것은 그 위에 덧입혀지는 나의 생각들에 온전히 그 대상을 바라보기가 어렵다. 점점 즐거움 속에 외로움이 스치고, 고요함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요를 마주하고 싶으면서도, 정작 그 고요 앞에서 나는 여전히 다른 나로 서 있다.

섬을 바라본 것도 묵직한 물 위에 홀로 떠 있는 존재의 고요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감각은 오래가지 못했고, 관광지의 요란한 간판들이 다시 마음을 어지럽혔다. 맛있고 재미난 것들이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편리하지만, 기대했던 풍경을 해치는 이질적인 모습들로 인해 불편함과 편안함이 교차한다. 그러다 나는 간판의 불이 꺼진 밤을 떠올리며, 머리 위의 달을 끌어와 그림 속으로 옮겼다. 땅은 옛부터 요란했고, 지금은 하늘과 땅 사이마저 떠들썩하니, 이제는 빌딩 숲을 피해 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며 달을 찾으러 다녀야 한다.

일부러 오지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도시에서 완전한 단절과 고요를 찾기란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모습들에서, 사물의 그림자 밖으로 만들어지는 빛의 형상과 달빛을 새로운 게이트처럼 삼아왔다. 이번 개인전은 달빛과 섬을 연결하였다. 섬은 하나의 인간이 앉은 자리 같았고, 비움과 상상의 사이에서 달을 매개로 정령들을 그려내듯 풍경을 그렸다. 뜨거운 구슬, 혼불처럼 말이다.

작업 과정에서 불쑥 떠오른 생각이 있다. 예전에 사주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새벽은 호롱불”이라는 말을 들었다. 믿음과는 별개로, 그것은 세상을 이루는 원소를 통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해석하는 하나의 관점이었다. 그 말이 당시의 내 상황과 닿았는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듯하다. 힘들때면 꺼내보는 작은 메모처럼 말이다. 작업 속에서 나는 달빛을 호롱불처럼 비추기도 하고, 저무는 태양 뒤로 작은 정령들이 깨어나듯 달을 떠오르게 했다.

세상의 번잡함과 냉정함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 속의 편리함 때문에 쉽게 떠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와 닿는 풍경을 일종의 명상의 장소로 전환시키려 했던 것 같다. 차가운 숨을 쉬면서도, 가슴 속 깊은 뜨거운 구슬을 찾아다닌다. 묵묵하고 말없는 섬, 그곳을 뜨거운 구슬로 비춘다. (허선정)

 

허선정_떠오르는 달_2024_장지에 석채, 아크릴_35×28cm

 

 

허선정_달의 출현_2025_장지에 분채, 아크릴_97×146cm

 

 

허선정_흐르는 달_2024_장지에 분채_81×117cm

 

 

허선정_구슬치기_2025_장지에 석채_35×28cm

 

 

허선정_구슬 무리_2025_장지에 분채_97×146cm

 

 

허선정_고목_2025_장지에 분채_163×113cm

 

 

새벽에 그린 달빛 그림자 - 허선정의 회화에 대하여

《차가운 숨과 뜨거운 구슬》 (2025, Art Space 103)에 부쳐

 

1.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삶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누군가는 살아가지만, 어떤 이는 그저 살아지며, 또 다른 이는 간신히 살아낸다. 누군가는 멈추지 않고 걸어야 겨우 옮겨지는 길 위를, 어떤 이는 그다지 힘쓰지 않아도 쉽게 나아가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잠시라도 힘을 빼면 굴러 떨어지는 비탈면을 견딘다. 그러나 각자의 그런 길도 운명의 변덕에 휘둘려 뜻밖의 예외를 만나고, 불현듯 모든 법칙이 무너지는 순간을 겪는다. 무엇도 단정할 수 없다는 사실만이 삶의 유일한 단서로 남는다. 무심하고도 쓸쓸한 진실로.

그러므로 미래에 대한 굳건한 계획이란, 변수를 대비하지 않은 처벌이 되어 때로 삶의 중심을 가혹하게 파고들 수 있다. 꿈꾸었던 희망은 낭만에 취한 한때의 자만에 불과하게 된다. 알더라도 경계하고 예단하지 않아야, 무감한 운명의 장난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신 앞에 자신을 낮추고 어린 선민이 되거나, 고통의 시간을 참선으로 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 우리는, 아는 것에도 알지 못하는 것에도 겸허하게 버티어야 살 수 있는 존재이므로.

회화는 그런 ‘버티기’의 과정을 간접적으로 들추어낸다. 삶이 잔상처럼 남겨둔 장면을 화폭으로 옮겨 파노라마 같은 여운을 재현한다든가, 보이지 않지만 예감처럼 감지됐던 운명의 모양을 가능한 수단으로 기록해 둔다든가 하면서. 화가는 세계의 난해한 것들을 온 감각을 다해 뒤좇고, 안개처럼 도처에 부유한 기운을 마땅한 재료로 예리하게 받아 옮긴다. 그렇게 회화에 담긴 이미지는 오늘날 숭고한 정령이 된다. 미완의 바벨에 담긴 이야기처럼, 서로 소통하지 못한 인간의 한계를 회화는 그렇게 말없이 머무르며 보완한다. 오래된 매체의 역사만큼이나 익숙한 얼굴로, 또 어딘가는 새롭고 낯선 표정으로, 회화는 우리 삶의 여정과 동행해왔다.

전시 《차가운 숨과 뜨거운 구슬》(2025)을 통해 또 한 번의 회화적 메시지를 본다. 장지 위로 스며든 고운 재료가 어우러 빚어진 은은한 빛깔을. 한때는 나무였고 한때의 광물이었던 것들이 서로 붙었다 말라 종이와 물감으로 팽팽히 얽어매진 신비를. 그리고 이들을 다루어온 화가, 허선정이 마침내 도달한 이미지-고즈넉한 자연과 묵상의 심상이 배합된 풍경을. 삶의 풍랑을 버티고 작은 항로를 마주하듯이 허선정의 회화가 여기 있다. 차가운 숨을 쉬고 뜨거운 구슬을 안은 채.

4.

회화는 본디 말이 없지만, 허선정의 회화는 더욱 말이 없다. 그것은 침묵과 사색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회화가 담는 것은 멈춤이 아니다. 빛은 그림자와 자리를 바꾸며 흔들리고, 달은 차고 기우는 순환을 반복하며, 창은 바람과 공기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다른 얼굴을 띄워낸다. 허선정의 《차가운 숨과 뜨거운 구슬》은 그 같은 고요와 변화의 풍경에 관한 것이다.

출품된 신작 <구슬치기>, <구슬 무리>, <고목>, <빛나는 구슬>, <낙하>, <징검다리>(2025)는 하나의 서사적 흐름으로 연결된다. 장지의 표층에 침윤한 재료들은 어둡고 가라앉은 색조 속에서 그 이야기를 풀어낸다. 둥근 달은 하늘의 빛에서 수면에 비친 그림자로, 다시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여정으로 옮겨간다. 빛은 물가에 선 고목의 밑둥, 뚫린 구멍 사이로 고개를 내민다. 이어 그 나무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고 그 정령을 또 다른 생명의 기운으로 옮겨놓는다. 그 뒤 뜨거운 구슬처럼 연기를 뿜으며 강물 위 포영(泡影)이 되어, 물살을 거스르지 않고 계속 이동한다. 이윽고 동양화의 안료처럼 층층이 퇴적된 모랫길을 지나 어느 섬에 다다른다. 아니, 누군가의 미간에 정지한 빛처럼 비치기도 한다. 그것도 아니, 이들은 모두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듯, 달은 하늘에 떠 있다. 우리가 바라보고 해석한 것들이, 무위(無爲) 속에서 빚어진 생멸(生滅)의 허상에 불과한 것처럼.

‘달·창’ 시리즈에 해당하는 이번 전시작들은 모두 몰각의 때를 배경으로 한다. 한낮의 도시 열기와 대비되는 이 풍광은, 잠든 듯 깨어 살아 있으며 빛과 어둠의 미세한 변화가 자연의 숨과 맥박을 조절하는 시간이다. 헤르만 헤세는 잠 못 이루는 밤이 의미가 있다며, 그 시간만이 우리의 영혼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충분히 놀라거나, 솔직한 감정을 의식하고,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허선정은 자신의 운명이 새벽의 옅은 불빛 같다고 말한다. 이는 사주명리에 드러난 작가 자신의 상징과도 겹치지만, 삶의 어둠을 견디고 예술로 묵묵히 정진해온 태도를 대변하는 진술이기도 하다. 허선정의 현재는 그림 속 달 그림자처럼, 고요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가만히 비추고 있다. 재현의 강박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마산과 부산의 바다에 깃든 유소년기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고, 일상의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서해안 섬을 찾아 그리면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생의 파노라마를 여러 번 훑고 이동하며 인식의 지층을 쌓는다. 그리고 마침내 정화(淨化)를 이룬다.

다만, 작가의 사유가 상념을 넘어 시대의 울림으로 확장되기 위해서는 집단적 경험과 공감의 층위를 불러내는 장치가 필요하다.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경험과 실존에의 탐구는 자칫 형이상의 도식적 답안으로 고양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한 성찰이 사회적 공감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그 그림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두의 얼굴을 또렷이 비추게 된다. 이에 허선정은 개인과 시대의 경계에서 맞닥뜨린 문제의식에 동의하며 작업의 실천을 이어가는 중이다. 자신을 너머 인간의 보편을 생각하고, 일상의 모습과 철학적 이치를 연결하면서. 이렇게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타자와 잇는 접속은, 끊어져 버린 연대의 ‘불안사회’에서 주체가 버티고 지켜야 할 과업이자, 각자도생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소명이다.

“고요를 마주하고 싶으면서도, 정작 그 고요 앞에서 나는 여전히 다른 나로 서 있다. (...) 이번 개인전은 달빛과 섬을 연결하였다. 섬은 하나의 인간이 앉은 자리 같았고, 비움과 상상의 사이에서 달을 매개로 정령들을 그려내듯 풍경을 그렸다. 뜨거운 구슬, 혼불처럼 말이다.”

계속될 작업의 파동을 의식하며, 《차가운 숨과 뜨거운 구슬》을 본다. 그 이름처럼 차가움과 뜨거움, 무형과 유형을 함께 품은 허선정의 회화들이다. 이 이미지는 우리를 채우고 또한 비워낸다. 낮 동안 지나쳤던 마음의 물결을 꺼내고, 밤 동안 망각했던 의식의 멍에를 매만진다. 살아감에 만났던 번잡함과 심연에 징처럼 고여 있던 우울을 이들 회화 속 풍경을 마주하며 잠시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자리를 지나 우리는, 운명을 차분히 바라보는 깨달음 사이에서, 또 하나의 피어난 이야기를 스스로 써 내려가게 될 것이다. 쓸쓸하지만은 않은 진실로. (오정은)

* 이 글은 오정은 평론가의 글 〈새벽에 그린 달빛 그림자 - 허선정의 회화에 대하여〉 중 1장과 4장을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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